Windjammer, 마지막 실용범선들의 이야기 - 4 파미르(Pamir)호 선박취미

- 요즘 바쁘게(?) 살다보니 포스팅을 못했군요. 정확히는 귀찮아서 이긴 합니다만 조금이라도 이런 얘기를 봐주시는 분도 있고하니 일단 써보겠습니다. 이번 배도 Flying P-liner에 속하는 파미르호입니다. 윈드재머, 나아가 범선시대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배이기도 합니다. 상업 화물운송을 마지막으로 한 배고 비극적인 해난사고로 사라진게 새삼 범선시대가 끝났음을 상기시켰거든요.
- 파미르호는 일반적인 윈드재머 형태인 4돛대 바크선 입니다. 지난 번에 소개한 5돛대 전장범선인 프로이센 같은 괴물딱지도 나오기는 했지만 결국 가장 선원들이 좋아한 선형은 이거였죠. 속도도 잘나고 돛대도 하나 적고 선체도 작은편이라 훨씬 운용하기 편했거든요. 아무리 증기기관이 달린 윈치를 써서 돛을 오르내린다고 해도 필요한 인원이 주는거지 일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닌만큼 항행에 드는 수고가 훨씬 줄어듭니다. 

- 관련정보를 간단히 적자면,

건조 : 1905년 Blohm + Voss(블롬 운트 포스社)
길이 : 전장 114.5 m , 넓이 : 14 m , 흘수 : 7.25 m
추진 : 범장(50년대에 보조엔진 추가), 돛 면적 총 3,800 제곱미터
속도 : 최고 평균속도 16노트

- 다른 P-liner처럼 파미르호도 남미 질산염 무역에 쓰였습니다. 주 항로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칠레의 발파라이소, 이키케였고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8차례 왕복했습니다. 그리고, 전에 포스팅한 전쟁기간 독일에 돌아오지 못한 배에 들어갑니다.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돌파할 도리가 없으니까요. 전후, 1920년에 이탈리아에 전쟁배상 명목으로 넘겨집니다. 이탈리아도 독일처럼 남미행 질산염 무역선을 원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 필요한 원양 선원을 모집할 수가 없어(-_-;;) 파미르호는 나폴리만에 정박한 채로 있게됩니다.

- 24년에 라이츠사가 파미르호를 다시 매입하여 31년까지 다시 남미루트에 투입합니다. 31년에는 핀란드의 에릭손이 사서 호주산 밀무역 루트에 투입합니다. 이 때엔 이미 세계대전 중 개발된 공중질소고정법 덕분인지 칠레산 질산염(초석)의 가격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항로를 바꾼 겁니다. 이 때쯤 해선 이미 윈드재머가 확실한 퇴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양범선의 전통이 강하고 숙련선원을 보유한 나라에선 아직 상업용도로 쓰고 있었던 거죠. 나름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항해자들을 배출한 이탈리아가 이 부분에선 영 활약이 없었다는게 재미있습니다.

- 41년 8월, 파미르호는 뉴질랜드에 노획됩니다. 마침 뉴질랜드 웰링턴항에 있다가 핀란드가 독일을 따라 소련을 침공했기에 적성국의 배가 되었기 때문이죠. 뉴질랜드 깃발로 바꿔달고 연락선이자 훈련선으로 주로 미국과 캐나다를 오갔습니다. 이 시절 일본 잠수함이 파미르호를 정선시켰다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원래대로라면 응당 침몰시켜야 겠지만 이 잠수함의 함장이 범선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였는지 차마 침몰시킬 수 없어 그냥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아마 모항에 돌아가서 곤욕을 치르지 않았을까요?

- 48년까지 파미르호는 뉴질랜드에서 썼습니다. 한번은 희망봉을 돌아 런던까지 갔죠. 이후 원 주인인 핀란드의 에릭손사에 복귀하여 49년에 범선사상 마지막 상업항해를 마치게 됩니다. 그 때, 에릭손사의 창업주이자 파미르호를 구매했던 구스타브 에릭손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회사를 물려받은 아들로썬 더 이상 이익을 낼 수 없는 범선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벨기에에서 해체될 운명에 놓였는데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서 이 배를 살리고자 나섰죠. 서독은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파미르호를 해양실습선으로 복귀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때 지금은 박물관이 된 파사트호도 같이 독일로 돌아왔죠. 사실 라이츠사의 P-liner라고 해도 전부 독일에서 건조된 건 아니고 영국 등지에서 산 중고선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파미르와 파사트는 분명 독일제이자 영광에 빛나는 범선들이었고 독일해운의 상징이 될만 했습니다.

- 하지만, 실제 운용환경은 좋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원양범선을 늦게까지 운용했던 독일이지만 때는 50년대입니다. 대전쟁을 겪고 난 뒤에 상업적 가치가 없는 범선관련 인원을 모으기가 난망했지요. 그래서 사관의 질 문제가 꽤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마지막 항해 때의 선장은 대형범선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고 1등항해사는 29살로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선장이 자신의 능력부족을 숨기려고 일부러 선원들을 험하게 다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배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험한바다를 항해한 만큼 외판에 녹이 슬고 누수도 꽤 심했다는 군요. 그래서 이곳저곳 손을 봤는데 이 때 보조엔진을 탑재하고 통신기기를 비롯한 몇몇설비를 근대화합니다.

- 1957년 9월 21일 파미르호는 아조레스 제도 근해에서 허리케인 캐리를 맞아 침몰했습니다. 캐리가 갑작스레 방향을 바꿔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파미르호는 침몰직전 긴급구조신호를 보냈고 미 해안경비대가 9일에 걸쳐 수색을 벌여 일부 생존자를 구조했습니다만 그 수는 86명의 선원에서 6명에 불과했습니다. 파미르의 침몰원인으로는 선장이 여러 위험요인을 무시하고 항해에 나섰다는 점, 숙련인원이 부족했다는 점(무선기사가 다른 일까지 해야 했기에 제 때 긴급 허리케인 경보를 수신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노후화된 선체가 버티지 못했다는 등 다양합니다. 어쨌든 이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죠.

- 파미르호의 침몰에 서독은 깊은 애도를 표시합니다. 생존자 수색기간 중에는 라디오 방송사들이 오락프로그램을 취소하고 새 소식이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군요. 외신들도 이 소식을 꽤 비중있게 다룬 듯 합니다. 구미인들에 있어 범선이란 건 이 때까지 단순한 배를 넘어선 무엇이었던 듯 하군요.

- 이 사건의 임팩트 때문에 구미에선 파미르호가 최후의 Flying P-liner란 잘못된 상식도 퍼진 모양입니다. 파미르호가 2차대전 후까지 남은  P-liner 4척(파미르, 파두아, 페킹, 파사트)에 들어가긴 합니다만 사실 마지막으로 건조된 P-liner는 라이츠사의 파두아호였고 파미르호가 침몰한 뒤에도 파사트호는 잠깐동안 현역이었죠.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훈련선으로 쓰이는 파두아는 말할 것도 없고요.

덧글

  • ghistory 2009/03/12 23:43 #

    바크선: 바크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블룸→블롬.
  • 윤민혁 2009/03/13 00:15 #

    바크선은 사각돛으로 추진하는 범선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 ghistory 2009/03/13 00:17 #

    윤민혁/ 감사합니다.
  • 지나가던이 2009/03/13 06:29 #

    보다 정확히는 맨 끝의 돛대에 종범(세로돛)을 달고 나머지는 횡범(가로돛)을 단 형태를 말합니다. 모두 횡범을 달면 전장범선(Full rigged ship)이라고 하죠.
  • ghistory 2009/03/13 23:07 #

    지나가던이/ 감사합니다.
  • ghistory 2009/03/12 23:44 #

    밀무역 루트: 왜 그리고 무엇을 밀수했는지요?
  • 윤민혁 2009/03/13 00:14 #

    "밀" 무역이죠.
  • ghistory 2009/03/13 00:18 #

    윤민혁/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 지나가던이 2009/03/13 06:30 #

    제대로 적어놓질 않아서 윤민혁님이 수고해주셨네요. ^^;; 호주의 "밀"무역(wheat trade)입니다.
  • ghistory 2009/03/12 23:45 #

    구스타프→구스타브.
  • 지나가던이 2009/03/13 06:35 #

    지적해주신 표기는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ghistory 2009/03/12 23:46 #

    근대화→현대화 아닐까요?

    아조레스 제도: 포르투갈어로는 아소르스 제도입니다.

    미국 해안경비대: 왜 미국의 해안경비대가 대서양 건너편까지 찾아갔는지 궁금합니다.
  • 윤민혁 2009/03/13 00:33 #

    미 해안경비대의 활동영역은 미국 연안과 함께 사실상 미국이 사용하는 거의 모든 상업/군용 항로이며, 이들 항로의 경비 및 감시는 현대 미 해안경비대의 주된 임무입니다. 북극해에서 캐나다 해안을 타고 미국 영해까지 내려오는 빙산의 감시도 미 해안경비대가 캐나다 해안경비대와 공동으로 실시하고 있죠.

    더구나 당시 윈드재머 파미르의 침몰 위치는 공해 한가운데였고, 인접에서 해군이든 해안경비대든 해난구조를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력 자체가 미 해안경비대와 해군밖에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미 해안경비대는 당시에도 웬만한 중소해군보다 대형 원양작전함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몇몇 친미 신생국가의 해군은 미 해군이 아니라 해안경비대가 육성해 주었을 정돕니다.
    여기에 해군보단 해안경비대가 인명수색 및 구조에 훨씬 특화된 조직이고, 침몰위치가 대서양 건너편이라고 하기도 미묘한 위치 - 아조레스 군도에서 서남서 600해리 거리. 대서양의 거의 정 한가운데입니다 - 였습니다. 거기에 마침 구조에 임했던 USCGC Absecon이 가까운 곳에서 정례 초계중이었어서 즉각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미 해안경비대가 일부러 달려간 게 아니라, 원래 그 근처에서 미 해안경비대가 작전중이었을 뿐이죠.
  • 슈타인호프 2009/03/13 00:40 #

    초기 한국 해군 고문관도 해안경비대에서 파견나왔었죠.
  • ghistory 2009/03/13 01:10 #

    전문가분의 상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해안' 경비대가 아니라 '해양' 경비대군요.
  • 지나가던이 2009/03/13 06:32 #

    - 현대화라고 할 수도 있는데 50년대에 이루어진 개량이라 좀 어감이 안맞는다고 봐서요.

    - 포루투갈어로는 아소르스 로군요. 그냥 아조레스가 우리에게 더 알려진 편이라 그렇게 썼습니다.

    - 미 해안경비대의 영역이 넓은 건 들어봤지만 그 정도인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윤민혁님이 운좋게 좋은 설명을 해주셨네요.
  • 슈타인호프 2009/03/13 00:39 #

    잘 읽었습니다. 멋진 시리즈였어요^^
  • 지나가던이 2009/03/13 06:33 #

    감사합니다. 근데, 아직 끝낼 맘은 없었는데 갑자기 끝내고 싶어졌습니당..
  • 슈타인호프 2009/03/13 10:37 #

    헉 설마 제 말실수 때문인가요 ㅠㅠ

    제목에 들어간 "마지막"이라는 단어 때문에 착각해 버렸네요 OTL
  • 프랑켄 2009/03/13 09:17 #

    이때까지 읽어보니 범선들이 항해하다가 폭퐁우에 휘말려 침몰한 것이 전부네요. ㅋㅋ
    단 한 척도 도크에서 분해되어 사라진 적도 없고, 장렬하게 마쳤다 하면 말은 맞지만......범선의 단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네요. 바로 돌풍에 무지 약하다는 것ㅡㅡ
    하긴 저렇게 수십 미터 되는 돛대에 돛을 가득 달고 다니니 생기는 필연적 약점이겠지만요.
  • 지나가던이 2009/03/13 10:49 #

    하하, 꼭 그렇지는 않아요. 스크랩된 것도 있습니다. 로손이나 와이오밍은 결함선에 가깝고 프로이센은 폭풍이 아니고 배끼리 충돌한 거니까요. 하지만, 사고로 사라진 배가 무지하게 많은 건 사실입니다. 단, 이건 당시 기선의 기록도 좀 봐야하지 않나 싶어서 판단보류 중입니다. 보통 폭풍우라기 보다 하역할 때 불이 났다던가 암초에 부딪혔다던가 배끼리 충돌했다던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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